작업노트



1.
대지는 제주 북동쪽 해안가 마을 동복리 끝자락에 있다. 유달리 바람이 많아 나무와 들풀이 육지를 향해 누워 자라던 해안가 언덕에는 두 동의 창고가 무심히 풍경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1982년 냉동 창고로 지어진 후 이런저런 사연으로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이 폐허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적막함에 매료되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과 거친 파도 그리고 들풀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채워진 격정이었다. 아름답지만 가혹한 제주의 풍경 속으로 침전되어가는 콘크리트 구조물과 태초의 암반이 뒤섞인 이 폐허에서 휘적거릴수록 이 장소는 나를 내가 속한 시간으로부터 이탈 시켜 의식 속 깊은 자리에 고정된 또 다른 나에게로 인도하였다. ' 그렇게 마주한 나는 서로 같은 모습이되 같게 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 경험은 디자인 과정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의 생각으로 발전되었다. 재생 프로젝트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새로이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이 폐허가 안겨준 감정을 부여잡고 싶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건축으로 새롭게 구축될 서사는 장소의 감각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이 폐허를 다시 오늘과 만나게 할 것이라 믿었다. 나의 설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2.
대부분의 재생 프로젝트가 그러하듯 철거가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한번 손대면 두 번 다시 제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기에 철거는 항상 어려운 선택의 연속이다. 모든 것들이 의미 있어 보이는 한편 장식처럼 무의미하다. 가장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믿는 수밖에 없다.

나는 건물의 절대적 크기(길이32 x 폭23 x 높이 6M)가 주는 압도적 공간감과 이를 고조시키는 라멘구조의 규칙적 반복이 그것이라고 확신했다. 결국 구조체를 제외한 실내 칸막이벽 전체를 포함하여 전체 벽체의 절반 이상이 철거되었다. 그렇게 새로이 만들어낸 공백은 건물 길이 방향 전체로 연속된 낮은 개구부를 통해 바다의 수평선과 만나게 되고 전면의 높은 개구부는 하늘을 담아낸다. 두 번째 건물의 경우에도 원칙은 같았다. 내부 칸막이벽은 차라리 조각에 가깝게 다뤄졌다. 다만 2M 간격으로 배치된 지붕 트러스와 구멍 난 슬레이트 지붕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시멘트 바닥을 뚫고 언젠가부터 자라난 나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결국 내부공간을 포기하는 이 결정은 사업주의 이해가 없었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장소는 때때로 비와 바람과 빛이 넘나들고 바다가 보이지 않되 아득한 파도 소리로 그려지는 적막한 폐허로 의도될 수 있었다.

3.
사업주가 설정한 용도는 휴게음식점을 포함한 복합문화시설이었다. 설계 초기에 두 창고 건물을 갤러리를 기본으로 다양한 문화행사를 소화 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으로 리모델링하고 카페와 베이커리를 수용하는 건물을 신축하는 큰 방향이 결정되었다. 그는 두 갤러러가 공간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건축이 되길 희망했다.

설계과정은 감정을 이성적으로 구축하는 시도였다. 나는 내가 매료되었던 폐허의 적막함이 철거와 재구축이라는 건축의 개입작업 후에도 여전히 장소의 감각으로 관람객들에게 발견되길 바랐다.

설계는 두 가지 관점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되었다: 설계자와 사용자. 나는 건축이 대중문화에 속한다고 믿는다. 이번 프로젝트 같은 상업건축일수록 대중이라는 사용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상품으로서의 건축이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주된 사용자인 관광객을 특정하기 위해 사전 조사가 이루어졌다. 주목할만한 사실로 렌터카를 이용한 여행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과 이러한 이동방식으로 인해 장소와 장소가 점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렌터카 중심의 여행이 갖는 특징은 예측 가능성이다. 이동 및 체류에 드는 시간을 예측 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관광객이 여행계획 단계에서 이미 경로와 지점(장소)을 결정한다.

블로그나 유튜브와 같은 SNS에서 마주치는 정보가 여행지를 결정하는 주된 기준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사업주는 핵심 고객층으로 많은 수의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를 설정하였는데,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이들이 장소를 이미지로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최근 1년 이내에 SNS를 통해 유통된 약 1만여 개의 제주 여행 관련 이미지들을 무작위로 수집하여 분석해 보았다.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유사한 이미지가 대단히 많았다는 것이었는데, 유명한 장소마다 일종의 시그니처 이미지가 있어서 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거의 같은 이미지들이 반복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수집한 이미지 중에서 중복되는 것들을 제외하고 그중에서 프로젝트의 프로그램과 자연환경 그리고 지리적 위치(일출-일몰에 관계) 등 여건이 유사한 키워드들로 다시 분류하여 향후 이 장소가 어떻게 이미지로 소비될 것인가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석-예측 모델을 기초로 공간의 연출 방법과 이야기를 담는 시퀀스의 틀이 결정되었다.

다시 설계자의 관점에서 이 틀에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한 계획을 이어갔다. 내가 설정한 주제는 폐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에 대한 것으로 두 건물에 걸쳐 계획된 시퀀스를 통해 서사화되도록 의도하였다. 무한한 척도의 바다 수평선,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인 하늘, 낯설게 하는 압도적 공간감, 시간의 유한함을 드러내는 오래된 재료의 물성, 찰나의 날카로움으로 빛나는 금속, 방향을 잃게 만드는 숲. 대지의 환경과 건축의 공간을 이러한 다양한 상징들로 치환하였고, 시퀀스 곳곳에 매복된 반사유리는 배경과 함께 관람객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배경이 변화하는 시퀀스를 따라 자신의 모습을 상징화된 배경과 함께 스스로 의미 짓는 경험이 공간을 구축하는 뼈대로 발전하였다.

보다 정교한 구성을 위해 반사유리는 그 설치된 환경의 조도 차이에 따라 배경의 반사/투과/중첩 효과가 조절할 수 있도록 인공조명과 함께 계획되었다.


4.
나는 상업건축의 목적은 상업적 성공에 기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상업적인 프로젝트가 여러의미에서 건축가의 이상을 펼치기에 부적절한 필드일 수 있다. 하지만 정교하게 기획된 상업적 장치들로 치환된 건축의 어휘들이 만들어 내는 스펙터클이 항상 저급한 취향의 것일 이유는 없다.

나는 상업건축의 설계과정이 마치 관객이 존재하고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 영화의 제작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 흥행하는 상업 영화가 예술영화와 구별되는 작품성 없는 오락거리에 불과하다고 쉽게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대중의 시선은 높아졌으며 다양한 주제들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의 저변은 넓어졌기 때문에 일 것이다. 같은 관점에서 나는 오늘의 상업건축이 흥미로운 변화에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이 주도하고 자본이 수용하는 이 변화에서 과연 건축가는 어떠한 가능성 펼칠 수 있을까. 나는 이번 작업이 잘 만들어진 상업 영화처럼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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