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예고- 건축문화유산 Typological model 01
여러 해 동안 누군가의 삶의 무대가 되었던 한 건물이 순식간에 사라질 때 그곳에 깃들어 있던 장소의 기억과 시간 역시 함께 소멸한다. 철거 후 공터로 남는 잠시 동안 무언가의 상실을 실감하지만, 어느새 지어진 건물은 공백의 장소를 익숙함으로 채워간다. 그리고 어제의 도시는 여전히 오늘의 도시이다.
개발의 수레바퀴 속에서 도시건축물의 생애는 한 세대를 넘기는 것조차 힘들 만큼 짧다. 건물과 함께 해체되는 장소가 늘어 갈수록 이 도시 공간은 짧은 기억이 반복되는 단기기억 상실의 장소들로 채워져 간다. 그럴수록 장소를 구축하는 삶의 누적된 기억으로 이곳에 정주함을 확인하던 우리는 여전히 이 도시를 부유하는 유목민으로 남는다.
오늘의 도시를 사는 우리가 시대와 함께하고 세대를 관통하는 장소들을 지속시키는 행동은 곧 이 도시와 함께하는 우리 자신의 존재 확인에 불과하다.
철거와 건축이 항상 역동적으로 공존하는 도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온 건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극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역사-문화적 객관화 된 가치를 인정받아 보존되는 소수의 문화재 그리고 그렇지 못한 낡은 건물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이분화된 존재 방식은 사건과 인물 중심의 거시적 역사관으로 도시-건축의 희소가치만을 조명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이 시각 아래에서는 대다수 일상의 건물들은 그 지속 가치를 증명하기 어렵다. 이 건물들은 사라진다.
이러한 가운데 원도심 재생 사업으로 근대건축이 재조명받고 있다. 철거 위기에 있던 오래된 건물들이 재평가되고 종종 현재에 쓰임에 알맞게 수리되어 새로운 지속력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근대건축물이 이러한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이유로는 자본으로서의 토지와 건물은 개발로 가치가 확장되는 시점이 올 때까지 최소 비용으로 운영되기 마련인데 대개 리모델링 비용은 신축에 버금가지만 확장된 경제가치는 기대에 한참 못 미치기 때문이다.
이 견고한 경제 논리를 넘어서 일상의 근대건축물들을 재평가하려면 여전히 이들의 객관적 가치를 증명하여야 한다. 역사적 인물이 태어난 집은 못되더라도 그가 밥이라도 먹었던 곳이어야 하는 것이다.
건축문화유산의 사라짐에 주목하는 실종예고 연작의 세 번째인 이 작업은 근대건축물 보존을 위한 가치의 객관화 방식에 의문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결국, 희소가치에 집중하는 이 방식은 대상 건축물을 선별하는 기준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으로 발전할 것인데, 이 시대에 판단하는 기준이 적확한가를 떠나서 문제는 이 보존의 논리가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는 대다수 근대건축물의 사라짐을 가속하리라는 것에 있다. 선례로 한옥 보존지역 설정 이후 지역 밖에 산재한 한옥들이 더 빠르게 사라지는 현상 이면에는 문제 해결을 위한 개입이 또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된다는 모순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번 작업 <건축문화유산의 유형학적 모델>은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우회하여 근대건축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상 건축물의 지속 가치를 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검은 철판에 녹의 결을 겹겹이 쌓고 다시 윤을 내어 흔적을 지우고 다시 녹을 내는 작업을 끝없이 반복하여 만들어지는 시간의 깊이. 세 가지 모양의 서로 비슷한 형태를 가졌지만, 쌓는 방식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보이는 모듈들. 그리고 이들을 구축하면서 발생하는 공간들과 관통하고 머무는 빛.
유형으로 읽히는 형태에 머문 시간과 공간과 빛. 작업이 담는 것은 이것 외에는 없다.
누군가 어떤 도시-건축에서 발견한 장소의 시간과 공간과 빛의 감흥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발견하고 공감하는 누군가가 다수가 된다면 지속을 위한 객관적 가치는 더는 거시적 관점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의 가치는 우리가 발견하고 우리가 만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