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_ ‘실종예고 - 바리케이트’

부유하는 시간과 기억들

글 박성진│월간 「공간」 편집장

바리케이트는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따라 하나의 도구와 수단으로 등장한다. 혹자에게는 자기방어와 저항의 기표로서, 그 반대에서는 탈주의 통제구조로서 동원된다. 그런데 작가 최무규는 여기 문래동에서 바리케이트의 실종을 예고한다. 순응과 자포의 제스처인가? 그것은 누가 세운 것이고, 등장과 실종은 어떤 사건들을 동반한 것일까? ‘예고’가 함의하는 미제의 시간 속에서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둔 자들은 누구인지. 그것도 이 남루한 도시의 한편 문래동에서…

문래동의 도시적 생태계는 쇠락하는 도심산업과 이를 밀어내는 자본, 그리고 그 공간적 시차를 비집고 들어간 게릴라성 예술로 뒤엉켜 있다. 도시가 확장되고 이를 자본이 잠식해 가면서 을지로와 문래처럼 공간효율이 떨어지는 도심산업들은 계속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밀고 버티는 힘겨루기 속에 생긴 작은 틈바구니로 예술이 흘러 들어오고, 이들이 지역과 연대를 이루며 자본에 저항한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작가들이 붙잡는 저항의 기반은 그 지역에 싹튼 장소와 삶에 관한 고유한 기억들이다. 최무규 작가도 그렇다. 아니 건축가이기도 한 그는 더욱 절절하다. 문래동에서 4년을 보냈다는 작가는 재개발에 대한 경험적 사상적 거부감으로 바리케이트를 구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가라는 직능의 윤리로서 재개발에 저항한다.

이번 전시에서 ‘바리케이트’는 마치 그 언어가 기표와 기의를 갖는 것처럼 임의의 형식과 내용으로 두 전시공간에 따로 부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 지역과 불가역적인 미래에 대한 자기표현으로 ‘구조의 언어’와 ‘언어의 구조’ 사이를 불안하게 오가고 있다. 마치 극장에서 일어나는 암전의 순간처럼 점멸하는 조명 속에서 자조와 자의지가 초조하게 교차한다.

그가 만든 것은 바리케이트이다. 물론 이는 정직한 구조이기보다 건축적 미적 행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철판을 절삭해 구부려 일정한 유닛을 만들고 이를 일정한 높이 혹은 특정 모듈로 늘어놓고 쌓는 건 건축가들의 습성이다. 다만 여기서 최무규는 배열의 임의성과 즉흥성을 더해 건축이라는 논리와 구축의 형식을 빗겨 미술의 개념적 틈새로 진입한다. 이는 목적성 구조라기보다 어느 순간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이 된다. 철판의 굴곡들 사이로 빛은 침투하고 굴절되며 이채로운 깊이와 입체를 만들어낸다. ‘실종예고’ 시리즈의 전작 ‘지워지는 도시’에서 “세 가지 모양의 서로 비슷한 형태를 가졌지만 쌓는 방식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보이는 모듈들. 그리고 이들을 구축하면서 발생하는 공간들과 관통하고 머무는 빛”이라는 작가의 설명에서 구조 자체의 공간과 미에 의식적으로 빠져드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작가가 건축가라는 사실이 개입되면 이 모습은 건폐율이 높은 도심상업지역을 채운 삭막한 빌딩 숲 사이의 풍경으로 읽혀진다.

바리케이트는 필연적으로 안과 밖을 나눈다. 혹은 좌우를 가르고, 탈주와 통제라는 두 가지 힘이 충돌한다. 그런데 어둠으로 가득 찬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에서는 이 모든 문맥과 구분이 지워져 있다. 문맥을 지움으로서 얻어지는 탈색적 상황에서 우리는 이 구조를 처음 마주한다. 당연히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지각은 이 구조의 윤곽과 형체를 파악할 능력과 겨를도 없다. 어둠에 적응하는 동안 우리는 형체 없이 어둠을 부유하는 이 구조를 불안하게 받아들인다. 불안한 지각 속에서 기의를 잃고 부유하는 이 구조의 언어는 위태롭기만 하다. 이런 불안을 틈새를 파고드는 낯선 사운드는 바리케이트라는 견고한 형식에서 저항, 방어라는 내용을 점점 더 옅게 만든다. 수단과 도구로서의 정치는 사라지고, 순수한 구조로 환원되었다. 이렇게 이 구조는 바리케이트라는 기표와 기의 사이를 미끄러지듯 오간다.

위층으로 올라가면 어둠이 아닌 밝은 빛이 언어를 밝히고 있다. ‘재개발은 공멸이다.’ 조금 전 구조의 언어로 말하던 작가는 이제 언어의 구조로 메시지를 전한다. 언어는 필연적으로 구조적이다. 문장 내부의 의미소에서도 그렇고, 문장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물리적 실체였던 바리케이트는 작은 문장으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조금 전 불안하고 위태롭던 구조의 언어와는 달리 문맥이 지워진 이곳의 문장에서 불안은 엿보이지 않는다. 이 규정명제에는 혼란을 일으키는 굴곡과 틈이 없다. 이렇게 탈문맥적 구조와 언어 사이에는 재개발에 대한 작가의 미묘한 혼란이 섞여 있다. 문래동에서 바리케이트의 형식과 내용은 이처럼 탈착의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구축-해체-재구축된다. 이것이 작가 최무규가 풀어낸 전시장의 내면적 풍경이자 그가 마주한 도시적 현실이다.

최무규의 작품은 구조와 언어로 드러난다. 언어에서도 그 기표와 기의 사이에 임의성이 있듯 작가에게 이 문래동이라는 형식과 내용 사이에도 미끄러짐의 틈이 존재한다. 알고 있는 현실과 부정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자조적 책망. 여기에는 건축가의 직능적 자아와 반동적 예술가로서의 자아가 충돌한다. 낮에는 건축가로서 이곳의 사업성 검토를 응대하고, 밤에는 재개발은 공멸이라며 다시 자아를 부정한다. 최무규의 입장은 이 문래동의 회색빛 하늘과 미래처럼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외치는 말이 무엇이고,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이 도시의 구조 속에서 기억의 누적과 갱생, 그리고 소멸은 늘 일어나고 있다. 바깥의 소음과 소란에서 닫힌 극장 안으로 들어왔건만 이곳의 구조와 언어는 전시장을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순종도, 자포도, 발악도 아닌 이 도시 속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되새김질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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